전체 글38 왕의 이름을 욕한 남자, 그는 왜 참형에 처해졌는가 불경죄(不敬罪), 왕을 욕한 혀끝의 대가조선 시대에는 왕의 이름, 더 나아가 왕에 관한 언급 자체가 신중해야 했다. 단지 실명을 부르는 것조차 죄가 되었고, 왕의 행동을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언행은 ‘불경죄’로 간주되었다. 이 죄는 조선 형벌 체계 중에서도 특히 무겁게 다뤄졌고, 실제로 불경한 언행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진 사례가 꽤 많았다. 1795년, 경기도 광주의 한 장터에서 시작된 소문 하나가 조정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한 중년의 남성이 술에 취해 사람들 앞에서 “정조가 글만 잘 써서 왕 됐지, 칼 한 번 못 휘둘러봤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술김에 내뱉은 허튼소리로 여겨졌지만, 이를 들은 포졸이 포도청에 보고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문제는 이 발언이 단순한 욕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조선.. 2025. 4. 14. 지방 관아의 부정부패, 그리고 조정의 판결 이중 장부와 사라진 세금, 들키지 않을 거라 믿은 권력1797년, 경상도 예천군에서 시작된 이 작은 고발은 단지 한 마을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세금은 피와 같았다. 그런데 마을 대표인 이모라는 노인이 포도청에 보낸 한 장의 탄원서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조직적인 세금 횡령 실태를 파헤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내는 곡물은 장부와 다르다”고 단언하며, 실제 거둔 양이 공적으로 기록된 수치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감사관이 내려가 조사했을 때, 수령과 이방, 서리들은 하나같이 “오해”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조사관이 예천 관아의 회계실 뒤편에서 발견한 은장부(隱帳簿)는 그들의 변명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백성들로부터 진짜로 거둬들인 세금 내역이 적.. 2025. 4. 14. 우물에 독을 탄 사람들, 조선시대 생화학 테러 사건 공동체를 노린 물의 독 – 조선 사회가 마주한 ‘보이지 않는 칼날’조선은 농업과 공동체 생활이 중심이던 사회였다. 마을마다 중심에는 공동 우물이 있었고, 이 우물은 단순한 식수 공급을 넘어 마을 주민들의 일상과 생존을 지탱하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바로 그 우물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독을 풀어넣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충격과 피해는 말 그대로 마을 전체를 무너뜨리는 수준이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는 우물에 독극물을 타 주민을 살상하거나 특정 집단을 해코지하려 했던 기록이 여러 건 등장한다.대표적인 사건은 1791년 전라도 나주 지역에서 발생했다. 당시 마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구토 증세가 퍼지면서, 수십 명의 주민이 사망하거나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처음에는 역병으로 오인.. 2025. 4. 13. 마을에 불을 지른 방화범, 조정이 내린 형벌은 불길보다 빠르게 번진 두려움 – 조선 시대 방화의 의미조선 시대, 불은 단지 재산을 태우는 재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공포의 상징이었고, 특히 고의로 불을 지른 자는 마을을 파괴하는 자이자, 조선의 법과 질서를 뒤흔드는 ‘사회적 파괴자’로 간주되었다. 방화범죄는 단순한 범죄를 넘어, ‘왕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해석되었으며, 가장 가혹한 형벌의 대상 중 하나였다. 실제로 경국대전과 대명률에는 방화죄에 대한 조항이 명시돼 있었으며, 특히 야간 방화 또는 주거 밀집 지역에 대한 방화는 무조건 사형으로 다스리라는 규정이 있었다.예컨대 1783년, 충청도 청양의 한 마을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농사 갈등으로 이웃과 불화를 겪던 장모라는 인물이 새벽녘 마을 한가운데에 불을 질렀고, .. 2025. 4. 13. 재판 도중 도망친 죄인, 조선은 어떻게 추적했는가 도망은 곧 반역, 조선의 죄인 탈주에 대한 인식조선시대의 형사 재판은 단순히 법을 다루는 절차가 아니라, 국가 권위와 사회 질서를 상징하는 매우 엄격한 과정이었다. 죄인이 포도청이나 형조의 심문 도중 도망치는 것은 단순한 탈주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법 질서의 붕괴’를 의미하는 중대 범죄로 간주되었다. 특히 중죄를 저질러 심문을 받는 중에 탈주한 경우, 이는 곧 ‘반역에 준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실제로 그에 상응하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형법상으로 도망죄는 명백히 규정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심문 중 도망한 죄인을 “기결 전 사범(事犯)”으로 분류하며, 일반 절도죄보다 훨씬 무거운 형벌을 부과하도록 했다. 또한 재판 도중 도망친 경우에는 당초 혐의보다 가중 처벌이 원칙이었다.. 2025. 4. 13. 세자의 목숨을 노린 칼끝, 조선 왕실 암살 미수 사건의 전말 칼날이 겨눈 곳은 한 나라의 미래였다1794년 봄, 경복궁은 유난히 고요했다. 해가 뜨기 전의 궁궐은 경직된 침묵 속에 휩싸여 있었고, 왕세자는 새벽 공기를 느끼기 위해 동궁 뒤편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처럼 시작됐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이 될 뻔한 사건이 벌어진다. 세자 주변을 경호하던 근위 무관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고, 바로 그 순간 검은 복면의 사내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다행히 무관의 빠른 반응 덕에 세자는 무사했지만, 단 몇 걸음 차이로 조선의 후계자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자객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품속에서는 짧은 쪽지가 나왔다. 그 안엔 "왕좌는 혈통이 아닌 능력의 것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누가 .. 2025. 4. 12.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