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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조선 최고의 금괴 절도 사건, 범인은 누구였나

by clover-story 2025. 4. 11.

조선 후기를 뒤흔든 ‘금괴 실종 사건’의 전말

조선 후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정치적 불안정, 지주와 농민 간의 갈등, 역병과 흉년이 반복되면서 민심은 흉흉해졌고,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금괴 절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금전적 손실을 넘어, 조선의 사법 시스템과 관리 체계, 그리고 당시의 신분제 사회가 얼마나 허술하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로 남게 된다. 사건의 시작은 1796년(정조 20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상도의 한 군현에서 조세로 걷은 금괴 30개가 수도 한양으로 이송되는 도중, 중간 경유지인 청송군 관아의 금고에서 금괴 전부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금괴는 단순한 지방의 금이 아니라, 국고에 직접 편입되어 군영 자금과 왕실 유지비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국가 자산이었다. 따라서 절도 사건이 보고되자마자 형조와 포도청은 물론, 정조 임금까지 직접 보고를 받고 “범인을 반드시 잡아 국법에 따라 다스리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도난 사건을 담당하던 관리와 하급 군관, 그리고 노비들까지도 금괴가 사라진 시점에 대해 일제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며 조직적인 은폐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계획된 내부 공모 가능성이 거론되며 수사는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조선 최고의 금괴 절도 사건, 범인은 누구였나

 

금괴 절도범은 누구인가? 내부자 공모설의 진실

사건이 알려진 지 일주일 후, 형조는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청송 관아의 금고는 하루에 두 번 관청의 군관과 서리, 그리고 노비가 함께 점검하는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절도는 그 사이의 틈을 노린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금고의 구조는 매우 단단하고, 열쇠도 이중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외부인의 단독 범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수사 방향은 내부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금고 담당 서리였던 김모와 하급 군관 이모가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특히 김모는 사건 발생 하루 전, 가족에게 “이번 일만 끝나면 한양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수상한 말을 남긴 정황이 포착됐다. 더불어 군관 이모는 금괴 도난 이후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고, 3일 후 관아 외곽의 산속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시신 근처에는 ‘자필로 보이는 종이쪽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나는 죄를 지었으니 죽음으로 속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글씨체가 본인의 것과 다르다는 진술이 이어지며 타살 가능성까지 수사선에 오르게 된다. 김모는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장시간의 문초와 고문을 받게 되지만,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는 “그날 금고에 들어간 적이 없다. 열쇠는 모두 상급자들이 관리했다”고 진술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하급 서리들의 증언도 나왔다.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김모는 석방되지만, 도난당한 금괴의 행방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수사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고, 조정 내부에서는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는 강한 의혹이 제기된다.

 

조선 사법제도의 허점, 왜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는가

금괴 도난 사건은 조선 정부에게도 매우 큰 충격이었다. 왕실과 국고를 향한 범죄는 국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당시 정조는 강하게 분노했다. “금 한 냥도 사라지면 그 지역의 수령은 목숨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선 사법제도의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조선의 수사는 대부분 고문을 통한 자백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물증이 없는 사건에는 매우 취약했다. 특히 조직적인 공모가 있었을 경우, 입을 맞춘 증인들이 한목소리로 부정하게 되면 사실상 진실을 밝히는 것이 불가능했다. 형조와 포도청은 사건을 ‘기록’하기에는 능숙했지만, ‘증거’를 분석하고 추적하는 능력은 현대적 의미의 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김모의 집은 샅샅이 수색되었지만, 금괴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모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자료조차 제출하지 못한 채, 20여 일간의 고문을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군관 이모의 죽음 또한 진정한 자살인지, 아니면 입막음을 위한 타살이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한양에서 파견된 감사관이 “모두가 침묵으로 공모하고 있다”는 평가를 남긴 뒤,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종결된다. 이후 정조는 청송 수령과 군관들을 대거 문책했지만, 도난된 금괴는 끝내 회수되지 못했고, 조선 사법사에 가장 수치스러운 기록으로 남게 된다.

 

금괴 절도 사건이 보여준 조선 사회의 민낯과 교훈

이 사건은 단지 금괴가 사라진 절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 후기 신분제와 행정 체계, 사법 시스템, 그리고 사회 윤리 전반의 부패와 허점을 폭로하는 계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조선에는 법이 있으나, 그것이 항상 옳게 집행되지는 않는다”는 말을 남겼고, 이는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현실의 반영이었다. 절도의 실질적 피해자인 조선 왕실과 백성은 끝내 책임자를 찾지 못했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다른 지역의 세금으로 메워져야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건 이후 조선 사회 전반에 퍼진 불신과 냉소였다. “왕실의 금괴조차 지킬 수 없는 세상이 백성 하나를 지켜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민간에서 퍼졌고, 이후 청송군에서는 수십 년 동안 부임하는 수령들이 극심한 경계와 감시를 받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이 조선 후기 관료제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형식적이고 보여주기식으로 굴러가던 행정 시스템, 증거보다 자백에 의존하던 사법 체계,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던 구조, 이 모든 것이 맞물려 한 번의 범죄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조선 최고의 금괴 절도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책임, 제도의 본질을 묻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