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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시신 없는 살인사건, 조선의 추리와 오판

by clover-story 2025. 4. 11.

시신 없는 살인사건의 발생, 조선 사법체계에 던져진 의문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형사 사건이 실록과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라는 독특한 형태다. 현대에도 이러한 사건은 법적 판단이 매우 어려운 대표적 난제 중 하나지만, 조선시대에는 수사기법이나 과학적 분석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더더욱 어려웠다. 조선후기인 1821년, 충청도의 한 읍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마을에서 평소 가족과 갈등이 심했던 장씨 성을 가진 여인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주변에서는 남편인 김모가 아내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살인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는 전혀 없었다. 단지 주변 사람들이 “부부싸움 소리가 심했다”, “그날 밤 김모가 들판을 나갔다 왔다”는 등의 정황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조선의 사법체계는 자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김모는 결국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법관들이 ‘실종된 피해자 = 사망’이라는 가정 하에 사건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신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죽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고, 법은 점점 정황에 의존한 판결을 내리게 된다.

 

시신 없는 살인사건, 조선의 추리와 오판

 

정황만으로 판단한 조선의 추리, 증거 중심 수사의 부재

조선의 수사방식은 기본적으로 자백 중심이었다. 고문을 통한 자백이 없으면 범죄를 입증하기 어려웠고, 직접적인 증거를 수집하거나 논리적으로 사건을 분석하는 능력은 매우 부족했다. 이 때문에 시신이 없는 상황에서 범죄가 성립될 수 있느냐는, 당시 형조와 사헌부에게도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앞서 언급한 김모 사건에서도, 포도청은 김모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며칠간 지속적인 고문을 가했다. 김모는 "나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반복하며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담당 수령과 수사관들은 주변에서 퍼지는 소문과 간접 정황만으로 ‘그가 범인임이 확실하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심지어 김모의 장모와 처형마저도 “그가 아내를 미워했다”고 진술하자, 포도청은 이를 사실로 판단하고 사건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러한 정황은 조선 수사체계의 결정적 약점을 보여준다. 객관적 증거 없이 심증과 여론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수사 기록 어디에도 김모가 범행 도구를 소지했거나, 피를 묻힌 흔적이 있었다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령은 “아내가 돌아오지 않고, 시신도 찾을 수 없는 것은 곧 살인을 은폐했다는 증거”라며 김모에게 도형을 선고했다. 이는 증거주의 원칙이 부재했던 당시 수사 문화의 결정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오직 ‘죽었을 것이다’, ‘그가 했을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김모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다.

 

형벌로 끝난 억울한 인생,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진짜 이유

김모는 도형 5년형을 선고받고, 제주도의 한 군현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노역을 하며 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형조에도 수차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보냈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 시스템은 한 번 내려진 판결을 번복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특히 정황증거를 기반으로 내려진 판결은 실질적 증거가 없다 보니 ‘잘못’을 명확히 입증하기도 어려웠다. 그로부터 3년 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김모의 아내 장씨가 살아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원래부터 남편과의 갈등이 심했고, 남편이 자는 사이 전 재산 일부를 챙겨 가출한 뒤, 다른 지역에 새롭게 정착해 있던 중이었다. 이름을 바꾸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던 그녀는 우연히 장터에서 자신을 알아본 옛 친척에 의해 존재가 발각되었고, 이 사실이 곧 조정에 보고된다. 형조는 즉시 김모를 석방하고, 그동안의 수사와 판결에 대해 ‘경솔했다’는 사과문을 작성하지만, 김모의 상처는 이미 너무 깊었다. 그는 노역 중 얻은 병으로 고향에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시신 없는 살인 사건은 결과적으로 실제 살인이 없었음에도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갔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진 비극으로 남았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형벌 중심주의’와 ‘증거 부재 상태의 판결’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법적 오판 사례로 기록된다.

 

조선의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남긴 법적 교훈과 현대적 시사점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단순히 조선시대 사법 시스템의 미비함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법적 원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조선의 사법은 범죄를 다루는 ‘절차적 공정성’보다, 범인을 ‘정의롭게 응징’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시신이 없는 살인사건과 같은 복잡한 사건에서는 그러한 응징이 오히려 무고한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김모의 사례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재 현대 사법제도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핵심이다.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증거’가 존재해야 하며, 정황만으로 유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의 수사관들은 당대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의심’이 ‘사실’로 확정되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고 억울함만 남는다. 김모의 사례는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법이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일 뿐,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벌하는 데 사용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현대의 수사기관과 재판부 역시 ‘추정’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 조선과 같은 오판을 되풀이할 수 있다. 과거의 오류를 되새기며, 우리는 더욱 정밀하고 공정한 법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김모와 같은 이들의 억울함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