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장부와 사라진 세금, 들키지 않을 거라 믿은 권력
1797년, 경상도 예천군에서 시작된 이 작은 고발은 단지 한 마을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세금은 피와 같았다. 그런데 마을 대표인 이모라는 노인이 포도청에 보낸 한 장의 탄원서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조직적인 세금 횡령 실태를 파헤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내는 곡물은 장부와 다르다”고 단언하며, 실제 거둔 양이 공적으로 기록된 수치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감사관이 내려가 조사했을 때, 수령과 이방, 서리들은 하나같이 “오해”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조사관이 예천 관아의 회계실 뒤편에서 발견한 은장부(隱帳簿)는 그들의 변명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백성들로부터 진짜로 거둬들인 세금 내역이 적힌 실장부였고, 장부에는 ‘임시 구휼세’, ‘보수세’, ‘향약기금’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 세금의 두 배에 달하는 양이 적혀 있었다. 조선의 세금 시스템은 공식적으로는 정해진 단가에 따라 수령이 걷고 상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비공식 장부는 수령 개인의 사금고를 만들어내는 도구였다.
놀랍게도, 감사관은 비슷한 장부를 서리들의 집에서도 발견했다. 이들은 매년 세금 납부 후 일정 금액을 ‘관청 수선’과 ‘행사비’ 명목으로 추가 징수했으며, 일부는 자신들의 장농 속으로, 일부는 수령의 별채 창고로 옮겨졌다. 백성들은 이를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군역을 더 부과하겠다” “다음해 추수 때 곡물을 더 걷겠다”는 협박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년간 반복된 약탈은 이제 관행이 되었고, 고발은 용기 이상의 결단이었다.
침묵은 협박에 무너지고, 고백은 곤장에서 터져 나왔다
감찰관이 한양으로 보고서를 보내자 형조는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수령은 곧바로 압송되었고, 함께 연루된 아전들과 서리들도 문초를 받기 시작했다. 수령은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했다. “나의 지시는 없었다. 그들이 자의적으로 한 일”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조정에 인맥이 닿아 있는 관리 출신이었고, 오랫동안 지역 유력 가문과 혼인을 통해 영향력을 다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서리 중 한 명이 문초 중에 “수령의 명 없이 저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이미 파직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이 증언은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 곤장 50대를 맞은 후 겨우 나온 한마디였다. 이후 다른 아전들도 연쇄적으로 “우리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라는 동일 진술을 남긴다. 수령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한양에서는 사건의 파급력을 예의주시했다. 지방 수령의 부패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 관아 구조 전체의 병폐를 반영한다는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수령이 아전에게 지시하고, 아전이 이방과 서리를 통해 실행하며, 그 사이에 백성들의 피 같은 곡물이 사라지는 시스템. 이런 구조는 이 사건에서 처음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수령이 직접 손에 피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 명령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위계 속에 흘렀고, 어느 누구도 감히 그 흐름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판결보다 더딘 행정, 정의가 머뭇대는 시간
형조로 사건이 넘어간 후 수사는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서류는 넘쳐났고, 증언도 분분했다. 하지만 수령이 누구의 추천으로 임명됐는가가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갑자기 얼어붙는다. 그는 중전의 외삼촌이었던 이모 대감의 추천으로 등용된 인물이었다. 이처럼 권력의 사슬은 진실의 속도를 늦추는 족쇄가 되었다.
정조는 사건 보고서를 보고 난 후, 직접 교지를 내렸다. “백성의 고통이 장부 속에서 사라지는 세상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특별 재판부’ 설치 명령이 내려진다. 이 재판부는 기존 형조 소속이 아닌, 직접 왕실 교지를 받은 임시 합동 조사단이었다. 정조는 신속히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실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무려 여섯 달이 걸렸다.
결국 수령은 파직과 함께 관노로 강등되었고, 이방은 유배형, 아전 둘은 유형 7년형을 받았다. 백성들에게는 2년간 세금 면제가 주어졌지만, 이미 농토는 망가졌고 사람들의 마음은 식어 있었다. 관아 앞을 지나가던 아이들은 이제 “관청은 곡식 훔치는 곳”이라며 웃었고, 성실하게 납세했던 농부는 논을 팔고 떠나버렸다. 판결은 정의로 끝났지만, 결과는 상처로 남았다. 이 사건은 조선의 법이 아무리 명확해도, 권력 앞에서는 종종 무기력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였다.
부패의 뿌리는 잘려도, 다시 자라났다
예천 사건 이후, 조정은 지방관 임명 시 ‘회계서약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해마다 중앙 감사관을 지방에 순차적으로 파견해 세금 장부를 열람하게 했으며, 백성의 고발이 들어온 지역은 감사 순서를 당겨 특별 점검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발휘하기엔, 시스템보다 빠른 부패의 적응력이 문제였다.
이방과 아전은 바뀌었지만, 장부는 여전히 두 벌이었다. 새로운 수령이 부임한 뒤에도, ‘전임자의 방식’을 답습하겠다는 이방의 발언은 지역 백성들을 실소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바뀌어도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부패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고발이 쉬워졌다는 점이다. 예천 사건 이후 조정은 고발자 보호제도를 도입했고, 신분을 익명으로 처리해 내부 고발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 제도를 통해 3년 내 15건의 지방 관아 비리가 드러났고, 이는 조선 후기 제도 개선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부패는 늘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만, 백성이 다시 입을 열 수 있는 체계가 존재하는 한, 정의는 결국 돌아온다. 조선은 완벽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점이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조용한 정의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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