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으로 태어난 몸, 죽음마저도 조용했던 여종
1804년 늦여름, 충청도 공주의 한 양반가에서 벌어진 사건은 당시 관아 안팎을 뒤흔든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박씨 가문의 둘째 아들, 박도진이 하인들을 통솔하는 과정에서 소속 여종을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문제는 당시 이 사건이 즉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가문은 곧바로 해당 여종의 시신을 뒤뜰로 옮겨 조용히 매장하려 했고, 이를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여종의 오빠였다. 같은 집에서 부엌일을 하던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끝에 관아를 찾아가 고발장을 냈고,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이 비로소 ‘사건’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종은 엄연히 ‘노비’라는 신분으로, 법적으론 재산에 가깝게 분류되었다. 그녀는 집안의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았고, 종종 주인의 성적 착취까지 견뎌야 했던 존재였다. 사회적 목소리는커녕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살아가던 이들은, 죽어서도 기억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박도진은 술에 취해 여종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디게 움직였다는 이유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다른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종은 한 시간 넘게 반복적으로 구타당했으며, 멈추려던 하인까지 박도진에게 뺨을 맞았다고 한다.
죽은 여종의 몸에는 40여 군데가 넘는 타박 자국과 장기 손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관아는 곧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노비였고, 박도진은 유력한 지역 양반가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이 사건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하고, 형조에 사건을 넘긴다. 이미 마을은 침묵했고, 가문은 위신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입단속에 나섰다. 결국 이 사건은 ‘살인 사건’이 아닌, ‘노비 과실 치사 사건’으로 정리될 뻔한 순간에서야 간신히 공론화된 것이다.
신분의 무게가 정의를 누를 때 – 형조는 누구의 편이었는가
사건이 형조로 넘어간 뒤에도 정의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형조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조사’를 진행한다고 밝혔지만, 실제 조사 과정에서 박도진에게 유리한 증언만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점, 구타의 목적이 훈육이었지 살인이 아니었다는 점 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형조에서 지정한 의관이 제출한 첫 진단서에는 장기 파열, 심한 출혈 등 명백한 외상에 의한 사망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두 번째 진단서에서는 “기존 지병이 사망의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는 문장이 등장했다. 이 진단서는 박씨 가문과 친분이 있는 의원이 작성한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조선 후기 양반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던 일이었다. 법은 모든 신분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의 체면’, ‘가문의 위신’이 형벌의 수준을 결정짓는 또 다른 기준이 되었다. 같은 죄를 지어도 양반은 유배, 중인이나 상민은 곤장, 노비는 사형에 가까운 처벌을 받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노비였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노비가 맞아 죽은 것”은 ‘사람을 죽인 것’보다 훨씬 가벼운 일로 치부되었고, 결국 박도진에게 내려진 형벌은 유형 3년이었다.
여종의 오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시 항소했지만, 그의 외침은 ‘신분상 열위에 있는 자의 감정적 호소’로 기록되었다. 수십 명의 진술과 명확한 외상 기록, 현장 증언까지 있었지만, 법은 박도진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에는 “본인의 반성, 우발적 상황, 피해자의 행실 문제 등을 고려해 경감한다”고 적혀 있었다. 과연 이 판결은 법에 의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신분에 의한 면죄부였을까.
살아남은 자의 절규, 조선은 과연 정의로운 나라였는가
사건이 마무리된 후, 박씨 가문은 박도진을 서울 외곽 별채로 보내 자숙하게 했다. 외부에선 그가 유배를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6개월 후 다시 집안의 일에 참여하고, 곧 결혼까지 하게 된다. 반면, 여종의 오빠는 관아에서 일하던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고을을 떠나야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 동생은 맞아 죽었다. 그런데 누구도 그녀를 죽인 자를 벌하지 않았다”였다.
이 비극은 조선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시스템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조선은 법치 국가였고, 경국대전이라는 정교한 법전을 갖춘 나라였다. 하지만 법은 그것을 해석하는 자들의 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가해자가 어떤 신분인지, 지역 관청이 어떤 가문과 가까운지에 따라 판결은 매번 달라졌다. 여종은 이름도 없이 태어나, 고통 속에 죽었고, 시신은 작은 무덤도 없이 묻혔다.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곧 잊었다. 누구도 다시 이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마을 기록에서도 삭제되었다. 하지만 여종의 오빠는 고을을 떠나기 전, 비석 하나를 세웠다. 거기엔 ‘여기, 억울하게 죽은 나의 피붙이가 잠들어 있다’는 글귀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사람이라는 증거는, 오직 그 돌 하나뿐이었다.
판결은 끝났지만,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 사건은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형조의 판결문과 지방 고을 문서에만 간략히 등장하는 이름 없는 여종의 죽음은, 조선 사회가 가진 구조적 차별과 법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이 사건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단지 역사적 사실을 들추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신분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권력과 자본, 학연과 지연이 정의의 형평성을 흔드는 일은 여전히 벌어진다. 여종의 죽음은 한낱 기록 속 사건이 아니다. 그녀의 억울함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단지 이름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계급이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조선이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 하나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법이 늘 정의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시는 ‘신분 때문에 죽어도 괜찮은 생명’이 생기지 않도록,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사람으로 죽을 수 있었는가. 그 질문에 우리는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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