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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뇌물 받고 살인범을 놓친 포도청 포졸들

by clover-story 2025. 4. 15.

사건의 시작, 살인범이 사라진 밤

1799년 한양 남부시장 인근, 새벽 무렵에 한 남성이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세곡(稅穀)을 담당하던 중간 관리로, 백성들 사이에선 성실하고 청렴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왕의 특명을 받아 지방에서 회계 보고서를 들고 상경 중이었으며, 사건 당일 저녁에도 기록 문서를 지니고 있었다. 사체는 다리 밑에서 발견되었고, 몸엔 다수의 자상 흔적과 함께 서류 가방이 사라진 상태였다. 당시 포도청은 이 사건을 ‘단순 강도살인’으로 판단했으며,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곧 뜻밖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돌았지만, 실제로 공식 발표나 재판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 감찰이 비공식적으로 개입하면서 충격적인 정황이 밝혀진다. 포도청 포졸 두 명이 용의자 체포 후 거액의 은자와 술상을 받았으며, 그 직후 용의자를 풀어줬다는 것이다. 당시 감찰 기록에는 “포도청 좌영문 포졸 이모와 박모가 용의자를 사흘간 구금한 후, 별다른 사유 없이 석방”했다고 남아 있다.

살인범은 사라졌고, 포졸들은 “도망쳤다”는 말 한마디로 책임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평소 한성 내 상인들과 뇌물 거래로 얽혀 있었으며, 이미 두어 차례 범죄자를 ‘눈감아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단지 살인자의 도주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조선의 치안 시스템이 돈 앞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뇌물 받고 살인범을 놓친 포도청 포졸들

 

뇌물, 침묵, 그리고 조직적인 은폐

사건은 포도청의 일개 실수로 치부되려 했다. 하지만 감찰 결과는 달랐다. 포졸 이모와 박모는 단지 범인을 풀어준 것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20냥 상당의 은자와 기녀를 동반한 술상을 받았고, 이 뇌물은 포도청 내 상관에게까지 전달된 정황이 있었다. 감찰부는 이 사건이 단독 포졸의 일탈이 아니라, 포도청 내부의 조직적 유착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했다.

조선 후기의 포도청은 형조 산하 치안 조직이었지만, 실상은 권한이 막강한 대신 감시가 허술했다. 포졸들은 백성의 범죄를 잡는 일을 맡았지만, 반대로 권력을 악용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경우도 많았다. 장터에서 보호세를 명목으로 돈을 걷고, 양반 자제의 범죄를 눈감아주는 대신 금품을 받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사건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었다. 살인범은 한 상단의 조카였고, 이미 이전에도 폭행 전과가 있었으나 단 한 차례도 처벌받지 않았다.

 

형조는 이 사건을 ‘공권력 실종’으로 간주하고 즉시 특별 재조사에 나섰다. 고문 끝에 포졸 둘은 뇌물 수수와 허위 보고를 인정했고, 포도청 내부에서 5명 이상의 관리가 이 은폐에 연루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조정은 이 사안을 단순 부정부패로 보지 않았다. 국왕은 “백성을 지키는 자가 백성을 죽이는 자를 놓쳤으니, 이는 법의 실패요 나라의 수치”라고 탄식하며 전례 없는 공개 처벌을 명한다. 이 결정은 이후 조선 사회에서 치안 조직 내부 비리를 다루는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형조의 판결과 조정의 반응, 법은 권력보다 무거운가

사건의 중심에 선 포졸 둘은 결국 형조 법정에 섰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명령 없이 움직일 수 없는 구조였다”고 진술했다. 즉, 상급자의 묵인 혹은 지시가 있었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실제로 조사 결과, 포도청 내 좌포도대장이 사건 발생 당시 이들에게 ‘적절히 처리하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는 간접적으로 책임이 위로까지 닿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포졸 둘은 장 80대와 유형 5년형을 선고받았고, 좌포도대장은 경고 조치만 받은 뒤 자택 근신 처분을 받는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살인범을 놓친 대가치고는 너무 가볍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형조의 판결은 ‘기득권 보호’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왕 정조는 특별히 이 사건을 실록에 기록하게 하며 후대의 경계로 삼으라 명했다. 이례적으로 포도청의 부패가 실록에 실린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며, 이는 단지 범죄 처벌이 아닌 체제 개혁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이후 한성에서는 포도청 개혁안이 검토되었고, 일부 포졸은 계약제로 전환되며 내부 감찰 체계를 강화하는 초석이 마련된다.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만 보자면, 살인범은 사라졌고, 하급자만 처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후대에 남긴 교훈은 분명했다. 법의 집행자조차 법을 어길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법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아니다.

 

부패를 감시하는 법, 부패를 낳는 권력

이 사건은 조선 후기 ‘제도 개혁’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당시의 형조는 그 사건을 단순히 포도청 내부 부정부패로만 처리하려 했지만, 조정은 그것을 통치 체계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바라보았다. 국왕 정조는 해당 사건 직후, “도성을 지키는 자가 도둑과 다르지 않다면, 나라의 바깥보다 안이 더 위험하다”고 발언하며 강력한 내부 감찰 체계 도입을 지시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사건 이후 포도청 내 ‘자백 보호 제도’가 한시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내부 고발을 장려하기 위해 포졸 중 스스로 부패를 자백하면 처벌을 감면해주고, 조직적 범죄를 밝힌 경우 ‘은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제도는 오래가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사회에 ‘공권력 감시’라는 개념이 처음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뇌물을 받고 살인범을 풀어준다는 건 믿기 어려운 부패다. 그러나 조선은 그 안에서도 변화하려 했다. 당시 백성들은 “비록 범인은 못 잡았지만, 이제 나라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말했다고 한다. 부패를 감시하는 법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법조차 부패한 자에게 좌우될 때, 그 사회는 망각으로 향한다.

살인범은 사라졌고, 그의 이름은 사초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졸 둘의 이름은 실록에 남았다. 그리고 국왕의 한 마디도.
“정의는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것, 그 생명을 팔아 넘긴 자는 죄인 중의 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