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했던 서원에 번진 폭력, 유생들이 휘두른 몽둥이
조선시대 유학 교육의 중심이었던 향교(鄕校)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지역 유생들의 사상과 도덕을 기르는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정조 13년, 전라도 남원 향교에서 예상치 못한 유생 간 집단폭행 사건이 발생하며, 향교가 곧 선비 정신의 전당이라는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건의 발단은 한 신입 유생의 입학을 두고 벌어진 내부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신분이 낮은 중인의 자제로 알려진 유생 김모가 향교 입학을 허가받자, 이를 문제 삼은 고위 유생 그룹이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선례”라며 입학을 반대하고, 조직적인 배척을 시도했던 것이다.
처음엔 따돌림 수준이던 행동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김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책과 짐이 훼손되었고, 식사 자리에서 “중인의 피가 유학을 더럽히는가”라는 말까지 들렸다고 기록돼 있다. 결정적인 사건은 음력 4월 초하루, 향교 내부의 토론회 이후 벌어졌다. 김모가 상석에 앉은 것에 분노한 일부 유생들이 그를 끌어내 폭행했고, 결국 그는 중상을 입고 향교 밖으로 쫓겨났다. 부상 정도는 심각했으며, 한쪽 눈은 실명 위기에 놓였고, 두개골 골절 소견까지 나온다.
놀라운 건 당시 향교 스승인 훈장이 이를 방관했다는 점이다. 그는 “학생들 간의 사소한 갈등”이라며 조정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김모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사건을 지방 관아에 고발한다. 이때까지도 향교는 자체 징계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으며, 가해 유생들에겐 단순한 ‘자숙’ 처분만 내려졌을 뿐이었다. 교육의 성지에서 벌어진 이 폭력은, 그들이 배워야 할 유학의 본질을 스스로 배반한 사건이었고, 결국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게 된다.
유생의 폭력은 교육인가 범죄인가 – 조정의 첫 반응
남원부 관아에 고발이 접수되자, 수령은 즉시 향교 측에 해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향교 훈장은 "학생 간의 사사로운 문제일 뿐, 국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사안의 심각성을 부인했다. 이에 수령은 피해자 김모의 진술과 의료진의 소견을 바탕으로 형조에 사건을 보고했고, 이 과정에서 향교가 내부적으로 수많은 폭력 사례를 묵인해온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모는 고발장에서 “이전에도 하급 유생에 대한 차별과 위계 폭행이 지속되어 왔다”고 진술했고, 일부 유생들 역시 익명으로 “어느 정도의 폭력은 향교의 전통”이라는 말을 남겼다.
조정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특별 감찰을 남원부에 파견했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김모를 폭행한 유생들은 단지 개인적인 분노에서만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향교 내부에는 이미 서열 중심의 폐쇄적 구조와 유생들 사이의 ‘비공식 규율’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폭력과 배척이 당연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특히 김모의 경우, 그의 성실함과 학문적 능력에 위협을 느낀 상급 유생들이 고의적으로 괴롭힘을 가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조정은 이 사건이 단지 지역 교육기관의 일탈로 끝날 사안이 아니라 판단했다. 교육을 통해 덕과 인의를 실현하라는 유교의 이상이 교육 공간 내에서 조직적 폭력과 배제의 논리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곧 조선의 교육 시스템 자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형조판서는 “지식이 곧 권력이 되어 그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그것은 도학이 아니라 또 다른 무력이다”라고 보고했으며, 국왕은 직접 이 사건에 대한 논의를 지시하게 된다.
형벌과 처분 사이, 유생은 어디까지 보호받아야 하는가
형조의 최종 조사는 사건 발생 5개월 후 마무리되었다. 가해 유생 4인은 공공 폭행죄로 기소되었고, 그 중 주동자로 지목된 유생 박모는 징계성 유형 2년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유생들은 각각 곤장 80대, 향교 퇴학, 과거 시험 응시 제한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 처분이 내려지기까지는 조정 내부에서 “유생의 신분을 고려해야 한다”, “교육은 감옥보다 먼저다”는 반대 의견도 존재했다.
실제 조선에서는 유생이라는 신분이 갖는 상징성이 매우 컸다. 유생은 단지 학생이 아니라, 장차 과거를 통해 조정에 진출할 사대부의 예비군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지는 법적 판단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유생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기준을 분명히 세웠다는 점에서 전례가 되었다. 특히 형조는 “유생은 학문을 위한 자이지, 권력을 누리는 자가 아니며, 군자란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여야 한다”는 판결문을 함께 남겼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여론은 미온적인 처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피해자 김모는 회복 후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 사건 이후 남원 향교는 한동안 문을 닫고 내부 정비에 들어갔다. 조정은 해당 훈장에 대해서도 직무 태만으로 문책했고, 향교 운영에 외부 감독 기구를 일시적으로 도입하는 개혁안까지 추진되었다. 이번 판결은 향후 교육기관 내 폭력 사건을 공공 범죄로 처리하는 첫 사례로 기록되며, 조선의 유학 중심 교육 이념에 경종을 울렸다.
학문의 탈을 쓴 폭력,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번 사건은 단순히 조선 향교에서의 집단폭행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권위주의적 폭력, 그리고 전통이라는 명분 아래 은폐되어 온 위계의 폭력 구조를 드러낸 중요한 계기였다. 조선은 유교적 질서를 기반으로 학문과 덕을 가르쳤지만, 그 교육 기관 내에서도 인간의 욕망과 권력 다툼, 배척과 차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뼈아픈 교훈이 된다.
오늘날 학교, 조직, 공동체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반복된다. 위계에 기반한 폭력,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제도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반복된다. 조선 향교에서의 이 사건은 “지식이 권력화될 때, 그 지식은 교육이 아니라 통제의 도구가 된다”는 경고를 남겼다. 당시 형조의 판결문에서처럼, 교육은 감옥보다 앞서야 하되, 그 속에 정의가 없다면 교육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묻고, 그 안에 숨은 권위주의를 걷어내야 한다. 학문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평등하게 마주하고 배워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남긴 이 사건은, 오늘의 학교, 오늘의 조직, 오늘의 공동체가 반드시 돌아봐야 할 거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를 자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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