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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정승가문의 하인이 저지른 강간살인, 신분은 법 위에 있었는가

by clover-story 2025. 4. 15.

평민 여인의 죽음, 권력가 하인의 죄

조선 후기인 1824년, 한양 서부의 외곽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은 조용히 시작되었지만, 곧 전국을 뒤흔들 파장을 불러왔다. 당시 한 정승가문에서 일하던 하인 '길복'이 인근 마을의 평민 여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피해자는 당시 18세였던 박씨 성을 가진 평민 여성으로, 집안일을 마치고 외출하던 중 실종되었다. 그녀는 이틀 뒤 논두렁 아래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몸에는 심한 폭행 흔적과 함께 성폭행의 징후가 명백했다.

문제는 이 사건의 피의자가 정승가의 사설 하인, 즉 가문이 고용한 사적 인력이라는 점이었다. 정승은 당시 조정에서도 손꼽히는 권세를 지닌 인물로,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대신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수십 명의 하인과 노비가 가문의 안팎을 지키고 있었다. 길복은 그중에서도 가문의 밀서를 전달하거나 외부 사람과 교류하는 임무를 맡은 신뢰받는 하인이었다.

 

길복은 사건 발생 후 이틀 만에 포도청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이후의 수사는 이상하게도 지체되었다. 포도청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그를 3일간 풀어주었고, 그 사이 증거는 대부분 소실되거나 사라졌다. 당시 현장을 조사한 하급 관리들은 “사건이 너무 빠르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불만을 토로했으며, 마을 주민들 역시 “평민이라서 법이 없는 것”이라며 공분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범죄가 아니었다. 하층민 하인이 가한 폭력이 권력가의 보호 아래 얼마나 쉽게 무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였다.

 

정승가문의 하인이 저지른 강간살인, 신분은 법 위에 있었는가

 

하인의 죄인가, 정승가의 책임인가 – 신분에 가려진 가해자

길복이 체포되자 정승가문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정승의 장남은 포도청에 직접 방문해 “길복은 가문에서 자란 자로, 범죄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며 강력하게 변호했으며,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 ‘억울한 누명’이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더불어 길복이 과거 병증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내용의 의관 진단서를 함께 첨부했다. 이 모든 자료는 단 며칠 만에 준비되었고, 이는 곧 정승가가 사건을 조기에 무마하려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줬다.

 

피해자의 가족은 포도청 앞에서 꿇어앉아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길복이 단독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포도청의 해명에 대해 "그를 감시하고 관리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느냐"며 정승가를 함께 고발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형법에서는 하인의 범죄는 원칙적으로 '개인 책임'으로 분류되었고, 주인이 그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해당되었다. 결국 정승가문은 모든 책임을 길복에게 전가하며, 스스로는 "잘못된 것을 알지 못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 하인 두 명이 길복과 함께 외출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그들은 “곁에서 술을 마셨다”는 사실만을 인정했지만, 현장을 함께 목격하거나 묵인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사건은 ‘단독 범행’에서 ‘집단의 침묵’으로 번졌고, 포도청은 점차 조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승가와 연줄이 닿아 있는 고위 관리들의 이름이 하나둘 나오자, 결국 이 사건은 형조로 이첩된다.

 


 

법은 누구에게 평등했는가 – 형조의 판결과 백성의 분노

형조에 사건이 넘어간 뒤, 백성들의 기대는 커졌다. “왕께서 아신다면, 정의가 살아날 것이다”라는 희망이 마을 전체에 퍼졌지만,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형조는 1차 판결에서 길복에게 곤장 80대와 유형 3년형을 선고했다. 그 근거는 “피해자의 죽음이 우발적 충돌의 결과로 보이며, 강간의 고의성 입증이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유생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어떤 판결이 강간과 살인에 대해 ‘우발적 충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걸까?

 

조선의 형법은 분명히 강간살인을 엄벌하고 있었다. 여성의 정절을 해친 자는 사형에 처하되, 그 행위가 살인으로 이어졌을 경우 더욱 무거운 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신분이 그 판결을 왜곡했다. 정승가의 하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정승가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벌인 수많은 수단들 덕분에 길복은 실질적인 형량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고 말았다.

심지어 형조 판결문에는 “길복은 충직한 하인이며, 이전까지의 품행이 단정했다”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피해자의 고통과 죽음을 무시한 채, 가해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문장으로 읽혔고, 이는 백성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이후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회자되며 조선 형조의 편향성과 불공정한 사법 체계를 고발하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조선이 남긴 질문 – 법 앞에 신분은 평등했는가

길복은 유배지에서 2년 만에 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병사였지만, 어떤 이는 ‘정승가의 정리’였다고도 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자의 가족은 마을을 떠났고, 그 딸의 무덤은 풀만 무성한 언덕 한가운데 남았다. 그녀는 정식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정은 이 사건을 서둘러 덮었다. 그 후로도, 정승가문은 아무런 제재 없이 조정 내에서 권세를 유지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명의 여성이 죽은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신분에 의존했고, 법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만 평등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하인은 하인이지만, 권세가 하인이었고, 피해자는 백성이었지만, 권력 없는 백성이었다. 법이 정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실천은 과연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가? 사회적 지위, 경제력, 정치적 배경은 여전히 사법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이 남긴 이 비극은, 그 시대의 이야기이자 현재의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반드시 되짚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그때의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가.
그리고 지금의 법은, 과연 누구의 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