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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왕족의 사기극, 조선은 왕족도 벌했는가

by clover-story 2025. 4. 16.

왕족의 탈을 쓴 사기꾼, 은밀하게 시작된 범행

조선 후기, 순조 10년(1810년) 무렵 한양에서 발생한 대형 사기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를 넘어 체제의 치부를 드러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주인공은 정식 왕위 계승 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종친부에 소속된 왕족 ‘이모’였다. 그는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정식 작위는 없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한양 시내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벌인 일은 다름 아닌 ‘위조 밀서’를 활용한 대규모 사기극이었다.

이씨는 궁중 내 외척과의 인맥을 활용해 가짜 왕명(王命)을 제작했고, 그것을 통해 지방 관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금전적 이익을 취했다. 특히 그는 “왕의 지시로 토지를 측량하러 나왔다”거나 “비밀리에 조정 명을 받아 군사 훈련을 점검하러 왔다”는 말을 하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관직이나 명령을 위조해 마치 자신이 국왕의 비밀 특사인 양 행동했다.

 

그의 수법은 치밀했다. 실제 관직명을 인용하고,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를 정확히 활용했다. 또, 주변에는 스스로 ‘공(公)’이라 칭하며 하인을 대동하고, 궁중 출입 경험이 있는 자들과 동행하여 그의 신분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한성부는 사건이 드러난 이후 “이미 수차례 이와 비슷한 행동으로 각 고을에서 피해가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피해자는 양반 상인, 관청 하급 관리, 지방 유지 등 수십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왕족의 일탈’로만 보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범행이 장기간 동안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쉽게 그를 심문하거나 고발하지 못했고, 의심하면서도 “괜히 건드렸다가 왕실의 미움을 사면 어쩌나”라는 두려움이 팽배했다. 결국 왕족이라는 ‘이름’이, 그의 범죄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왕족의 사기극, 조선은 왕족도 벌했는가

 

고발된 왕족, 조정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은 한성의 중간 관리였던 김호가 공식적으로 왕명 위조 정황이 담긴 문서를 형조에 제출하면서부터였다. 김호는 “자신이 속한 부서의 상관이 이씨의 밀서로 인해 부당한 처분을 받았다”며 형조에 직접 진정을 올렸고, 그로 인해 비로소 한성부와 형조가 정식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수사 초기부터 수상한 흐름이 이어졌다. 종친부는 “해당 인물이 정식 작위도 없고, 왕실의 명을 받은 적도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정작 이씨는 왕실 내부의 인맥과 함께 여전히 조정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 상황은 곧 사회적 논란으로 확산된다. 한양 시내에서는 “왕족이면 죄도 피해 가는가?”, “백성이면 참형인데 왕족이면 경고로 끝나는 것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유생들 또한 이 사건을 두고 ‘왕족의 윤리’와 ‘왕실 내부 통제의 실패’를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일부는 “만약 이씨가 평민이었다면 이미 참형을 당했을 것이다”라며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형조는 수사를 확대하면서도, 처벌 수위에 대해서는 종친부와 조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씨는 1차 조사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왕족이 어찌 그런 짓을 하겠는가”라며 당당하게 답했고, 심문 중에도 사대부적 언변으로 조사를 지연시키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그의 집에서 발견된 가짜 문서 수십 건, 피해자들의 일치된 진술, 함께 범행을 도운 하인의 고백 등이 쌓이면서 결국 부정은 힘을 잃었다. 형조는 “피의자의 죄는 중하나, 신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을 판결문에 남긴다.

 

이 문장은 조선의 형벌이 ‘신분 앞에서 평등하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신분은 죄보다 무거웠는가 – 형조의 최종 판결

형조는 이 사건에 대해 최종적으로 ‘종친의 이름을 더럽히고, 백성을 기만한 죄’라고 판단했다. 이는 일반적인 사기죄보다 훨씬 무거운 죄명이었다. 그러나 형량에 있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이씨에게 참형 또는 적어도 유배 이상의 형을 원했지만, 형조는 결국 그에게 ‘3년 금고와 거처 제한’이라는, 지금으로 치면 집행유예에 가까운 판결을 내린다. 그는 한성 내 거주와 조정 출입이 금지되었고, 일정 기간 동안 외부인과의 접촉도 제한되었지만, 명백한 신체적 형벌이나 재산 몰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판결은 즉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생들은 “이 나라의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제목의 연서를 돌렸고, 일부는 국왕에게 직접 ‘왕족 내부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국왕은 판결문을 보고 난 뒤 “왕족이 백성보다 도리를 잃었다면 더 무겁게 다뤄야 한다”고 지적하며 형조의 처벌이 가볍다고 경고했지만, 추가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왕족도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주었으면서도, 동시에 ‘왕족이기에 죄가 경감될 수 있다’는 이중적인 교훈을 남긴 셈이다.

사건 이후 이씨는 조정 출입이 금지되었지만, 5년 후 다시 왕실 행사에 얼굴을 비쳤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처벌받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왕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면책된 인물로 기억된다. 이 사건은 조선의 법체계가 권력에 따라 휘청거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조선 말기 왕실 기강의 해이와 함께 법의 불평등성을 비판하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처벌’이 아니라 ‘기준’이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조선 후기 사회의 권력 구조와 사법 체계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왕족이라는 특권을 이용한 사기극, 그것을 묵인하거나 방조한 주변 권력자들, 그리고 조정의 눈치를 보며 처벌을 축소한 형조의 결정까지. 하나하나가 조선이 왜 개혁의 목소리를 피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오늘날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그 실천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시험받고 있다. 권력자의 자식, 재벌가의 범죄, 고위 공직자의 비리가 가볍게 처리될 때마다 우리는 이 조선의 과거를 떠올려야 한다. 과연 법은 누구의 편인가. 누가 죄를 지었고, 누가 그것을 덮고 있는가.
조선은 비록 200년 전의 나라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법적 불평등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왕족도 죄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약하게 벌을 받았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왕족이라서 살았다면, 평민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선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