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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사또의 사치로 굶주린 마을, 백성의 고발은 받아들여졌을까

by clover-story 2025. 4. 22.

탐관오리의 사치, 가난한 고을엔 겨울조차 사치였다

조선 영조 9년(1733년), 전라도 정읍에서 벌어진 한 사건은 당시 조정과 형조에 보고되며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한 마을의 수령, 즉 사또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공공 자금을 유용하고, 그 여파로 수개월 동안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비변사등록』과 『승정원일기』에 일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당시 백성들의 집단 고발과 탄원이라는 이례적인 대응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읍 현감이던 조선 관료 장윤석은 중앙에서 고위 관직 경력이 없던 지방 관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임하자마자 마을의 곡식 창고를 사적으로 사용하고, 관청의 쌀과 세곡을 빼돌려 자신의 사저에서 연회와 사냥, 개인 사치를 위한 창고로 활용했습니다. 게다가 관청에서 관리하던 건물 보수 비용까지 허위로 청구하여 중앙에서 내려온 세금의 일부를 빼돌리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문제는 그 여파였습니다. 당해 겨울, 기록적인 한파와 흉년이 겹치며 농민들의 피해가 컸지만, 정작 곡물은 창고에 있지 않았고, 관청의 구휼도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결국 추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굶어 죽는 이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몇몇 집은 아녀자들이 아이들을 남겨둔 채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윤석은 중앙에 “고을은 안녕하며, 구호는 충분하다”는 보고서만 올렸습니다. 이러한 ‘거짓 보고’는 당연한 관행처럼 여겨졌지만, 그해는 한 가지 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백성들이 직접 탄원서를 작성해 한성부로 전달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고, 백성들의 마지막 수단이었습니다.

 

백성이 직접 고발한 관리, 그 목소리는 들렸을까

조선 시대 백성의 고발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의 탄원은 지역 관리나 서리(書吏)에 의해 필터링되거나,
중앙에 도달하더라도 서열 높은 관료의 인맥과 권력에 막혀 사라지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정읍 고을의 이 사건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한성에 머물던 지방 유생이 이 탄원서 전달에 협조하면서, 상소 형태로 의금부와 형조에 동시 접수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곧바로 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영조는 평소 탐관오리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밝혀온 군주였습니다. 그는 즉시 내수사와 암행어사에게 정읍 조사를 명령했고, 1개월 후 암행어사가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장윤석이 1년간 유용한 세금이 무려 150석 이상이며,
공적 문서 위조, 백성들의 사망 은폐, 구휼곡 횡령 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조사관은 기록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창고는 비었고 백성의 방은 얼어 있다. 사또의 집은 연회로 따뜻하고, 시체는 마을 어귀에 덮이지 못한 채 누워 있다.” 이처럼 참담한 현장은 보고서 그대로 왕에게 보고되었고, 결국 장윤석은 파직과 함께 형조로 압송되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바람처럼 그가 사형되거나 중형에 처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무능의 과오”로 규정되어 유형 3년과 재산 몰수형만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의 행정 시스템이 일정 부분은 백성의 목소리를 반영했지만, ‘신분적 관용’이라는 한계를 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고통을 말할 수 있는가? 조선 백성의 목소리 구조

이 사건은 조선 백성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겸사서(兼司書)’나 ‘신문고’ 같은 민원 제도가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관리의 허가 없이는 백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게다가 고을 수령은 해당 지역 내 거의 절대 권력자로, 그가 문을 걸어 잠그면 백성은 벽에다 소리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읍의 백성들은 함께 모여 진정서를 작성하고, 일부는 몰래 장터 행상을 가장해 한양까지 상경해 탄원서를 전달하는 노력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민란이 아닌, 체계적인 문제 제기의 형태였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백성도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사회 변화의 징표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앙 관료의 반응은 어디까지나 ‘부분적 수용’에 그쳤습니다. 가해 관리가 받는 형벌은 백성들의 상처에 비하면 가벼웠고, 그 이후 고을에는 새로운 수령이 부임했지만 구휼 제도가 완전히 복원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습니다. 즉, 백성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바로 정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사회’라는 것이 이 사건이 던지는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조선은 유교 윤리를 중시하는 나라였지만, 그 윤리가 고위 관리들의 부정을 덮는 명분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사또의 사치로 굶주린 마을, 백성의 고발은 받아들여졌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백성의 목숨 값은 왜 가벼웠나

장윤석 사건은 단지 한 지역 관리의 일탈로 보기에는 너무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실패이자, 정의가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굶어 죽고, 시체가 묻히지 못한 마을에서도, 중앙 관료가 내린 처분은 ‘유형 3년’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정의였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이 사건을 되돌아보는 이유는, 그 당시 조선의 법과 제도가 가지는 한계와 교훈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행정 권력은 통제되지 않으면 백성을 죽입니다. 사치는 누군가의 생명을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정의는 가난한 자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과 언론, 시민사회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행정의 문제를 고발하고 논의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목소리가 왜곡되거나 지워지는 일도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조선의 한 고을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소리친 백성들의 외침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백성의 고통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자, 그는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이 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정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