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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장례 중 일어난 강간 사건, 조선은 어떻게 판결했나

by clover-story 2025. 4. 21.

슬픔 속에서 벌어진 참혹한 범죄

조선 후기인 순조 9년(1809년), 경상도 밀양에서 발생한 한 사건은 당시 지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양반가의 장례식 도중, 상복을 입은 친족 여성에게 강간 범죄가 자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은 조선 유교 사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의례 중 하나로, 가문의 명예와 체면이 집약된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 신성한 공간에서 범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성범죄를 넘어서 ‘가문 전체의 수치’로 인식되었고, 피해자와 그 가족은 사회적 낙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건의 가해자는 사망자의 먼 일가 친척으로, 장례 당일 밤 빈소 주변의 행랑채에서 상주 역할을 하던 17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여성은 상복을 입은 채 슬픔에 잠겨 있었고, 주변은 깊은 밤이라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해자는 술에 취한 채 행랑채로 들어와 여성을 위협하고 힘으로 제압한 뒤 범행을 저지릅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피해자가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 사회에서는 여성의 정절이 매우 강조되었고, 특히 혼기가 다가온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알려질 경우, 피해자임에도 결혼이 어려워지고, 집안의 체면까지 손상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결국 피해자는 이틀이 지나서야 가까운 여종에게 사건을 털어놓았고, 이 사실이 점차 가문에 알려지면서 장례가 끝난 직후 관아에 고발장이 접수되기에 이릅니다.

 

장례 중 일어난 강간 사건, 조선은 어떻게 판결했나

 

유교 중심 사회에서 성범죄는 어떻게 다뤄졌는가

조선은 유교적 윤리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기 때문에, 성범죄에 대한 인식과 판결 기준도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성범죄는 피해자의 의사보다 ‘정절의 유무’, 즉 저항의 정도가 판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제로 『경국대전』 형전(刑典)에는 강간죄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존재하지만, ‘완강히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범한 경우’에만 가해자의 유죄를 인정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아는 “피해자가 충분히 저항했는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문제는 피해자가 가해자와 친족 관계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장례식 도중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에게 해를 당한 사실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공개하기조차 두려운 일이었으며, 당시 관행상 여성의 직접 진술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 사건은 몇 가지 증거와 주변인의 일관된 진술로 인해 가해자의 혐의가 명확히 입증됩니다. 피해자의 옷가지에 남겨진 흔적, 함께 자던 하녀의 증언, 그리고 가해자가 술을 마시고 행랑채에 들어간 시점의 목격 진술 등이 모두 일치하면서 형조는 가해자에 대해 정식 기소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판결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약한 처벌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가해자는 참형이나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유형 5년과 곤장 100대, 가문 제적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양반 신분이라는 점, 초범이라는 점, 그리고 피해자가 직접 처벌을 강하게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점 등이 고려된 결과였습니다. 여성의 정절을 보호하겠다던 유교 사회에서조차,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문의 체면과 가해자의 신분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던 현실이었습니다.

 

피해자에게 내려진 ‘침묵의 처벌’

법적으로는 가해자가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실제 피해자에게 내려진 비가시적인 ‘2차 처벌’은 훨씬 더 깊고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여성은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혼인 가능성은 사실상 0에 가까웠고, 특히 친족 간 사건일 경우 그 여성은 가문 내에서 ‘더러워진 존재’로 취급받기 일쑤였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역시 사건 이후 결혼을 앞두고 있던 사윗집에서 파혼을 통보받았고, 그녀는 이후 수년간 혼례를 올리지 못한 채 집안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가문은 외부에 이 사실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 내용을 비밀에 부치려 했고, 관아에도 별도로 “기록을 남기지 말아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했다는 기록이 실록 일부에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 성범죄 피해 여성은 법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숨겨져야 할 존재’로 격하되는 구조 속에 있었습니다. 또한 피해자의 어머니는 수차례 상소를 통해 피해 여성의 명예 회복과 결혼 가능성을 조정에 요청했지만, 조정은 “혼인은 개인 간의 일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습니다. 결국 피해자는 스스로 신분을 낮추어 중인의 자제로 신분을 변경하고 하급 관료와 결혼하게 되며, 양반가의 여식으로서의 삶은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이 강조했던 ‘여성의 정절’이라는 개념이 진정한 인권 보호가 아닌, 가문의 체면과 남성 중심 질서의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장례의 신성함은, 여성의 고통 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장례는 그 자체로 숭고하고 신성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신성함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개인, 특히 여성의 고통을 지우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장례 중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의 목소리가 지연되었고, 가문이 체면을 이유로 사건을 축소하려 하면서 진실이 은폐될 뻔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인권 개념과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전통 문화, 가족 구조, 체면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례가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이 조선의 장례 중 강간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명예인가?”, “누구의 침묵이 희생되고 있는가?” 법은 이제 가해자의 죄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를 중심에 놓고 판단해야 합니다.

 

조선이 그 당시 놓쳐버린 정의, 그 침묵 속에 잊혀졌던 여성의 존엄을 우리는 이제 기억하고, 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