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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 사건

신분을 속이고 관직을 산 남자, 조선 사회의 허점

by clover-story 2025. 4. 23.

중인의 야망, 양반의 껍질을 뒤집어쓰다

조선 후기인 영조 18년(1742년), 한 중인 남성이 신분을 위조하고 관직을 구매하여 양반 행세를 하다 적발된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신분 위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유교적 질서를 바탕으로 한 사회 체계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았으며, 실제로 형조는 해당 사건을 ‘사직의 근본을 뒤흔든 중죄’로 판단했습니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은 본래 한양 남부에서 활동하던 의생(醫生)이자 중인 신분의 이수겸(가명)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수겸은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도전했지만, 신분 제한으로 인해 관직 진출에는 명확한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표면적으로는 과거제도를 통해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강조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정규 과거 시험에서 관리가 되려면 양반 출신이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요구되었으며, 중인은 잡과(雜科)를 통해 기술직에 진출하더라도 문반·무반 관직과는 엄격히 구분된 경로를 걷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수겸은 결국 신분을 조작한 문서를 위조하고, 지방의 부패한 서리들과 결탁하여 양반 문중의 족보를 조작, 자신을 ‘이산군 이씨 가문의 5대손’이라 주장하며 한성부의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 후 그는 내수사 관리와 내통해 한직이지만 관직 매매가 가능한 자리인 종9품 서리에 지원하였고, 합격 통보를 받은 뒤 실제로 관복을 입고 정기 출근까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를 수상하게 여긴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장원급제 출신은 아니나, 조정에서 천거되어 발탁되었다”는 말을 자주 하며 겸손과 예법을 잘 갖추는 모습을 보여 의심을 피해갔습니다. 그런 그가 드러나게 된 계기는, 한 관리의 혼사 과정에서 족보 검증을 하다 정체가 들통난 일이었습니다.

 

관직은 사고, 신분은 위조했다, 조선 사회의 관리 임용 구조

조선 시대에는 공식적으로 관직을 돈으로 사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후기 사회에 접어들면서 은밀한 관직 매매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직(閑職)이라 불리는 업무 부담이 적은 지방 관직이나, 중앙 행정의 말단 관리직은 금전만 있으면 별다른 검증 절차 없이도 취임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수겸이 선택한 종9품 서리직 역시 그런 관직 중 하나였습니다.문제는, 그가 서리직에 취임한 뒤 그 업무 능력이나 언행이 주변 관리들 사이에서 ‘꽤나 능숙하다’는 평을 들으면서 상급 관리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문서 정리와 간단한 보고서를 잘 써낸다는 이유로, 내수사에서 파견 요청을 받을 뻔한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이력은 허위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의 조작은 족보 위조, 서류 날조, 뇌물 거래, 인맥 매수 등 복합적인 행정 허점을 악용한 결과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양반 족보 한 권을 얻기 위해 은 30냥을 지불했고, 향리 두 명에게는 “서류 도장 하나당 은 5냥”의 금액을 건넸다고 진술합니다. 당시 형조는 이 사건을 접한 뒤, “관직은 백성 위에 서는 자리이니, 이를 속인 자는 나라를 속인 것과 같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단순 개인의 위법이 아닌, 조선 후기 신분제 동요와 행정 구조의 부패가 맞물린 상징적 사례로 확대되어 해석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수겸이 실제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형조 내부에서는 “그를 처벌하되, 능력은 인정해야 한다”는 이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조선 후기 관료 체계가 이미 ‘신분이 아닌 실무 역량’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던 조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분을 속이고 관직을 산 남자, 조선 사회의 허점

 

들통 난 거짓 신분, 조선은 어떻게 처벌했는가

형조는 조사를 통해 이수겸의 모든 행적을 파악한 뒤, 그가 신분을 위조하고 관직을 매수했으며, 공문서를 위조하고 향리들과 공모하여 행정 질서를 훼손한 점을 명확히 밝혀냅니다. 그에 따라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위훈죄(僞訓罪): 존재하지 않는 가문 계보를 주장한 죄
  2. 관직 매수죄: 부정한 경로로 관직을 얻은 죄
  3. 문서 위조죄: 향안 기록 조작 및 가문 족보 위조
  4. 향리 회유죄: 관리 공모 및 뇌물 제공

이 중 위훈죄는 조선시대에서도 매우 중하게 다뤄지는 죄목이었습니다. 국가의 신분 질서를 흔드는 범죄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참형에 해당하는 중형도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수겸은 중인 출신이라는 점, 실제로 해당 관직에서 뚜렷한 문제 없이 업무를 수행했던 점, 그리고 자백 과정에서 반성의 태도가 진정성 있게 드러났다는 점 등이 참작되어 곤장 100대, 유형 7년, 향리 두 명은 파면 후 유배라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판결 이후에도 오랫동안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회자되었습니다. 특히 성균관 유생들은 이 사건을 두고 “신분은 배울 수 없으나, 능력은 익힐 수 있다”는 논설을 내기도 했으며, 과연 신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로 발전해나갑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단순한 위조 범죄 사건이 아니라 조선 후기가 ‘정체성의 위기’와 ‘개방의 신호’를 동시에 보인 사회적 전환기적 사건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위조된 관복이 드러낸 진짜 문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이수겸 사건은 우리에게 단순히 조선시대 한 인물의 야망과 거짓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거짓이 가능했던 조선의 제도적 구멍과 구조적 허점입니다. 신분이 곧 권력이었던 조선 사회는 그 신분을 증명하는 족보와 향안, 문서에 맹목적으로 의존했던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손쉽게 조작될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신분 사회 자체의 허약함을 그대로 드러낸 결과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수겸처럼 실제로 능력이 있었던 인물들이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하고 편법을 택하게 만드는 구조도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시험을 통해 능력을 평가하고, 공정한 채용 제도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출신, 배경, 연줄, 경제력 등이
기회의 형평성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는 사회 구조가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조선의 이수겸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던집니다. 공정한 사회는 누가 무엇을 증명했는가보다, 어떻게 증명되었고, 그것이 진짜 능력인지 묻는 구조가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투명하지 않다면, 이수겸 같은 사람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게 되어 있습니다.